개발/기타

효율을 가장한 비효율

JonghwanWon 2026. 7. 12. 11:59

일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기보다, 앞으로 가는 척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1년 전쯤만 해도 나는 그 차이를 잘 몰랐다.

 

기능은 계속 만들어졌고,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팀이 적극적으로 AI를 사용하기 시작한 뒤로는 생산성도 더 높아진 듯했다.

처음에는 분명 좋은 변화라고 생각했다.

 

PD는 자신이 구상한 기능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고, PO는 제품 정책과 기술적 제약을 더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

FE는 간단한 API를 설계했고, BE는 간단한 화면을 구현했다.

 

흔히 말하는 역할의 경계가 빠르게 흐려지고 있었다. 그 모습은 꽤 멋져 보였고, 동시에 조금 두렵기도 했다.

 

기획 초안은 금방 나왔다. 스펙은 빠르게 정리됐고, 화면의 문구도 몇 번의 프롬프트만으로 그럴듯해졌다.

예전 같으면 여러 사람이 모여 이야기했을 내용을 한 사람이 정리해 공유할 수 있게 됐다.

 

그러던 어느 순간부터 묘한 불편함이 생겼다.

기능을 개발하는 동안 막연한 의구심이 들었다.

 

기획 문서를 다시 들여다보니, 우리가 만들고 있는 기능이 정말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고 가치를 전달할 수 있을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처음에는 AI가 만든 문서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AI는 시킨 대로 했을 뿐인걸 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문서를 너무 빨리 믿었다는 데 있었다. 문서는 이미 완성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비어 있는 문서는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 드러낸다.

반면 AI로 작성한 그럴듯한 문서는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감춘다.

 

역할의 경계가 흐려지고 더 넓게 본다는 말은 생각보다 위험할 수 있다.

넓게 본다는 것이 각 영역의 깊이를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문성 없는 확장은 빠르다. 하지만 그 빠름은 자주 다른 사람의 시간을 가져다 쓴다.

AI를 활용해 다른 역할을 흉내 내는 것은 그 사람의 일을 대신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만든 결과물이 오히려 조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의 시간을 더 많이 쓰게 만들기도 한다.

AI Slop은 단순히 품질이 낮은 콘텐츠의 문제가 아니다. 겉으로는 효율처럼 보이지만, 실제 비용은 다음 단계로 밀려난다.

 

효율을 가장한 비효율이다.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어떤 판단은 내가 할 수 있고 어떤 판단에는 다른 사람의 기준이 필요한지 알아야 한다.

그 경계를 알 때 협업은 더 정확해진다.

전문성은 벽이 아니다. “여기부터는 내 일이 아니야”라고 선을 긋기 위한 것도 아니다.

 

프로덕트를 만든다는 것은 결국 수많은 결정을 쌓아가는 일이다.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숨길지.

무엇을 시스템이 감당하게 하고, 무엇을 사용자에게 맡길지.

무엇을 지금 만들고, 무엇을 만들지 않을지.

이 결정들은 단순한 산출물이 아니다.

각자의 전문성 위에서 내려져야 하며, 동시에 서로의 전문성과 연결되어야 한다.

 

요즘은 역량 강화라는 말을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된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역량 강화일까.

AI를 이용해 더 많은 역할의 말을 흉내 낼 수 있게 되는 것이 성장일까.

 

역량 강화는 내가 만드는 결과물의 양이 늘어나는 일이 아니라, 내가 내리는 판단의 품질이 높아지는 일에 가깝다.

범위를 확장한다는 것은 그 판단을 더 넓은 맥락에 연결하는 일이다. 넓어지기 전에 먼저 깊어져야 한다.

깊이 없는 확장은 결국 얕은 문제 해결을 만든다. 얕은 문제 해결은 빠르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반대로 깊이를 가진 확장은 조금 느려 보인다.

질문이 많아지고, 결정은 신중해진다.

문서에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것은 실패의 비용을 앞에서 치르고, 이후의 협업 비용을 줄이는 일이다. 결국 결정의 품질을 높이는 과정이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사람의 판단이고, 판단의 품질은 전문성으로부터 나온다.

 

요즘 좋은 팀이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한다.

모두가 모든 일을 하는 팀이 좋은 팀일까. 아니면 각자의 일을 지키면서 서로의 일을 모르는 팀이 좋은 팀일까.

아마 둘 다 아닐 것이다.

 

좋은 팀은 각자의 전문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의 영역을 이해하려는 팀이다.

서로를 대신하려 하기보다 연결하려는 팀이다. 빠르게 만들기 전에 무엇을 판단해야 하는지 먼저 묻는 팀이다.

 

앞으로 역할의 경계는 계속 흐려질 것이다. 그 흐름을 막을 수도 없고, 막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장 자주 판단해야 하는 영역에서는 나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잊지 말아야겠다.

깊이 판단하지 못한다면 넓음은 쉽게 소음이 된다. 소음은 생산성이라는 이름으로 팀 안에 쌓인다.

 

지금 우리는 역량을 강화하고 있는가. 아니면 역할의 모양만 넓히고 있는가.

AI로 사고를 확장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고하지 않은 결과물을 빠르게 만들어내고 있는가.

 

프로덕트를 만든다는 것은 결국 낯선 문제를 계속 마주하는 일이다.

그 낯섦 앞에서 필요한 것은 더 빠른 척하는 것도, 더 많이 아는 척하는 것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각자의 전문성으로 다시 질문하는 태도다.

이 결정에는 누구의 판단이 필요한가.

이 문서는 어떤 책임을 남기는가.

이 결과물은 다음 사람의 일을 줄이는가, 늘리는가.

이 속도는 진짜 속도인가, 아니면 비용을 뒤로 미룬 것인가.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지고 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팀은 넓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얕게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깊이를 가진 채 넓어지는 것.

어쩌면 이것이 진짜 역량 강화에 더 가까운 모습일지도 모르겠다.